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버튼 FC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에버턴 F.C.는 1878년, '세인트 도밍고 교회'의 신자들이 창설하여 '세인트 도밍고(St. Domingo's)'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. 원래 이 팀은 [[크리켓]] 팀이었으나, 크리켓이라는 경기가 여름철에만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서 구단은 겨울철에도 할 수 있는 스포츠 팀을 만들고 싶어했다. 그래서 별도의 축구팀을 만들게 되면서 St. Domingo's Football Club이 에버튼 축구 클럽의 시초가 된다. 그리고 1년 후에 인기가 많아지면서, 지역의 이름을 따 에버튼 FC(Everton FC)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. 에버턴의 초창기 구장은 '스탠리 파크'로 관중석이 없는 일반 공원에서 축구를 했었다. 그러다 보니 인근의 많은 인파가 몰렸고, 항상 소음이 끊이지 않아 소음 문제로 이사 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. 그 뜻을 받아들인 에버튼은 [[안필드]]로 홈구장을 옮기게 되면서 안필드의 첫 주인이 된다. 그러나 안필드 경기장의 소유주였던 존 오렐의 동료 양조업자였던 존 하울링이 안필드를 구매하게 되면서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다. 존 하울링은 안필드 경기장을 구매한 뒤 이를 이용해 에버튼 회장 자리까지 올랐고, 임대료를 기존의 150파운드에서 250파운드로 대폭 상승시키는 등 클럽을 본인의 사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는다. 에버튼 이사회와 존 하울링은 의견 대립으로 서로 부딪치면서 에버튼 구단은 새로운 구장을 물색하게 되는데, 바로 이 구장이 현재 에버튼 홈구장으로 쓰이는 [[구디슨 파크]]이다. 1892년에 지어진 구디슨 파크는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지어진 메이저 축구장이기도 한데, 영국 왕 [[조지 5세]]가 방문하면서 더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. 에버튼이 나간 안필드에는 존 하울링이 새 축구 클럽을 창단하게 되는데, 이것이 바로 [[리버풀 FC]]이다.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에버튼과 리버풀 사이의 축구경기는 [[머지사이드 더비]]로 불리며 이피엘에서 유명한 [[더비 매치]] 중 하나가 되었다. 1878년에 창설된 에버튼은 1888년부터 풋볼 리그의 원년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, 1890/91 시즌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초창기부터 강세를 나타냈다.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리그와 FA컵을 각각 1개씩 땄었다. 팀 역사상 첫 전환기는 1925년에 [[트란미어 로버스]]에서 [[딕시 딘]]을 사면서부터였다. 1927/28 시즌 중반까지 최고 기록은 59골이었고 그가 57골을 기록했을 때는 단 한 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. 결국 기록을 깨려면 [[해트트릭]]을 기록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스날이라 모든 사람들이 최다 골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.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는 [[해트트릭]]을 기록해 리그 최고 기록인 60골을 기록했으며,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. 1929/30 시즌 때 22팀 중 꼴찌로 강등됐지만 그는 팀에 꿋꿋이 남아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1시즌만에 선두로 1부 리그에 재승격시켰고, 1931/32 시즌에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다. 1960년대는 에버튼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손꼽히는데, 이 시기에 획득한 주요 타이틀은 두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FA컵 우승 등이다. 당시 에버튼은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경기 스타일로 인해 '스쿨 오브 사이언스(School of Science)'라는 애칭으로 불렸다. 1961년에 팀의 [[중앙 공격수]] 출신인 해리 캐터릭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원 수비, 전원 공격을 앞세운 '토탈 풋볼'을 적용시켜 로이 버논과 [[알렉스 영]], [[조 로일]] 등의 활약으로 1962/63 및 1969/70 시즌에 각각 리그 우승을 했고, 1965/66 시즌에는 FA컵에서 우승을 했다. 이후 1970년대 들어서는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해왔으나 라이벌 팀 리버풀에 가려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다. 리버풀이 [[유러피언 컵]]을 연패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에버튼은 강등권으로 내몰리는 수모를 당했을 정도였다. 그러나 1984/85 시즌에는 통산 여덟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기지개를 폈고, 컵 위너스컵까지 제패하는 쾌거를 이룩했다. 1979년부터 부임한 필립 카터 회장은 1980/81 시즌 도중에 '캐터릭의 아이들' 시절 멤버이던 [[하워드 켄달]]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5년에 리그 우승과 UEFA 컵위너스컵에서 우승시킴으로써 또 전성기를 누릴 찰나, [[헤이젤 참사]]가 터진다. 리그 우승은 에버튼에게 새로운 전성기의 시작을 알리는 상승세의 조짐과도 같았지만, 불운하게도 에버튼은 1985년 [[헤이젤 참사]]로 인해 다른 잉글랜드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5년간 유럽 대항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. 라이벌 팀 리버풀 팬들에 의해 일어난 헤이젤 참사는 에버튼의 상승세에 제동을 걸었고, 설상가상으로 에버튼은 리버풀과의 막판 경합을 이겨내지 못해 1985/86 시즌 리그 준우승에 머무르는 분루를 삼켰다. 198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에버튼은 이후 중위권과 하위권을 전전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. 하락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 매년 강등권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'대탈출'이 이어진 데다 [[머지사이드 더비]]에서도 매번 리버풀에 밀려 팀 사정이 암울했다. 2001/02 시즌 막판에 [[프레스턴 노스 엔드]] 감독이었던 [[데이비드 모예스]]를 영입하였는데, 이 영입이 구단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. 부임 초기부터 15위로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 뒤 2002/03 시즌에 신동 [[웨인 루니]]의 활약으로 7위를 찍었으나, [[블랙번 로버스]]보다 승이 많은데도 UEFA컵에 출전하지 못했다. 모예스 감독은 적은 돈으로 [[가격 대비 성능비]]가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팀의 전력을 차차 상승시켰다. 그러나 2003/04 시즌에선 한 시즌 만에 강등을 걱정할 정도까지 가면서 17위로 순위가 급격히 추락했고, 설상가상으로 2004/05 시즌을 앞두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[[유로 2004]]에서 4골을 터뜨려 득점 2위에 오른 신성 [[웨인 루니]]를 [[맨체스터 유나이티드]]에 팔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강등 유력 후보로 거론됐으나, 잉글랜드 정통 축구의 맥을 고수하며 리그에서 폭풍을 일으켜 4위를 찍어 챔피언스 리그까지 갔다. 이후 2016/17 시즌까지는 리그에서 꾸준하게 중상~중위권 순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, 2017/18 시즌부터 잘못된 감독 선임, 감독과 선수 간 불화 등으로 성적이 들쭉날쭉하다가 2021/22 시즌부터 강등을 겨우 면하고 있다. 1995년 FA컵 우승이 마지막 우승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